예수를 구주로 받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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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한다’는 말처럼 우리는 현재 우리가 거주하는 캐나다의 법률을 지켜야 합니다. 나는 한국사람이니깐 하고 무시할 수도 없고 내가 가지고 있는 익숙한 한국의 법률상식으로 판단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왜냐하면 “법”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님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노회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안건을 놓고 토의하다가도 “법이요”라는 한 마디가 선언이 되면 모두가 그 “법”을 지켜야합니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가 “법”이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어기거나 무시한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법”을 잘 알고 지킨다고 이야기하면 어떨까요? 우리는 아마 그가 “법”이라는 말의 제대로 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만이 나의 구원자이시며 나의 주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합니다. 이 “구주”라는 말은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꼭 기억해야 할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님이 내 안에 거주하신다는 사실을 믿기 시작하면 우리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예수님이 내 삶에 개입하시게 됩니다. 이것은 결코 가상적이거나 비유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실제적인 믿음의 삶의 실재를 매일 매일 경험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하고 예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상하죠? 왜 이런 차이가 나오는 걸까요? 가장 중요한 차이는 바로 예수님을 “구주”로 제대로 인정하는가에서 옵니다.

성경의 비유 중에 예수님을 신랑으로 교회(믿는 이)를 신부로 이야기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남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이 여러분이 생각하는 1등 신랑감일까요? 아무튼 그 예수님과 여러분이 결혼생활을 해 가는 것을 생각해봅시다. 행복한 결혼생활일까요? 죄송한 이야기지만 우리 모두는 예수님과의 결혼 생활을 그렇게 순탄하게 보내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부는 서로 모든 것을 맞추고 닮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도권 싸움이 일어나죠? 서로 자기에게 상대방을 맞추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네 각자의 실제 부부생활을 돌이켜 보면 그렇게도 많이 싸우고 위기가 많았던 것이겠지요. 그리고 지난 그런 위기의 순간들을 넘기고 나니 이렇게 부부가 서로 겨우 조금씩 닮아가고 서로를 이해하는 모습이 된거죠? 그렇다면 예수님과의 부부로 생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예수님을 나에게 맞추고 내 삶의 기준과 잣대를 강요하며 그것을 인정해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신랑으로 내가 그 분의 신부가 된다는 것은 서로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부인 우리가 주님이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기준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죽이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왜냐면 예수님이
“구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의 종입니다. “구주”라는 말은 로마의 황제에게 사용된 칭호이기도 합니다. 황제의 말은 거역이 불가능한 반드시 지켜야하는 신성한 칙령이었습니다. 하물며 일개 사람인 황제의 말이 그러했다면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뜻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예수님을 “구주”로 인정하고 “부부생활(우리의 인생)”을 살아가지 않고 내가 주인이 되어 예수님을 나에게 맞추려고 합니다. 그러니 내 삶속에서 예수님이 행하시고자 하는 놀라운 역사는 일어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뜻을 이루도록 우리는 내 삶의 주권을 주님께 드려야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참된 순종은 순종의 시기와 장소를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2022년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 우리는 먼저 주님과의 관계를 제대로 설정하고 나가야겠습니다.

다트머스 한인교회 담임목사 김승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