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죽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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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가 본적이 있나요? 혼자하는 여행은 오롯이 자신에게 맞춘 일정을 짤 수 있고 심지어 그 일정을 쉽게 변경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일행이 있다면 그럴 수 없습니다. 일정을 짜는 것에서부터 모든 것을 상대방과 함께 상의해야 하고 조율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 여행의 목적지가 어디였던지 그 여행은 분명 불행한 여행이 될 것입니다. 함께 하는 내내 서로 불편하고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당연하게도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한 채 여행을 하게 되면 문제가 생길 확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의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엄밀히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 성령 하나님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결코 떠나시지 않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그 때부터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 없이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불편하고 어색한 동행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과 동행(따라감)을 원하는 자들에게 먼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만들어갈 관계의 조율에 원칙에 대해서 천명해 두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입니다.

즉 예수님은 함께 나아감에 있어서 우리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하나님과 함께 동행할 수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을 오해하면 하나님은 나와의 관계 가운데 일방적인 포기와 죽음을 요구하시는 것처럼 느껴져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의 이 말씀의 앞부분을 살펴보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셔 자신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나아감을 먼저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의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이 먼저이고 그 죽으심과 그 십자가를 보고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그 분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인생의 길을 걸어가길 원한다면 반드시 우리는 자신을 죽여야 합니다. 나를 죄악에서, 영원한 심판의 자리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놓았습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것은 나를 위해 그 영원한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에 힘입은 것입니다. 그 사랑에 힘입어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을 위하여 내 생명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죽음에는 사랑이 우선입니다. 사랑없는 죽음은 율법이고 껍데기입니다. 윤종신의 “환생”이라는 곡은 사랑하는 연인 때문에 자신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이야기하는 곡입니다. 평소엔 잘 씻지도 않고 투덜거리기만 하던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자 그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평소와는 다른 모습으로 완전히 변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달라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이 사람이 평소 자기와 다른 모습으로 이렇게 변하면서도 결코 그 변화가 어렵거나 저항하지 않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만일 사랑이 없이 이 사람에게 이런 변화를 요구했다면 이 사람에게는 끔찍한 요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래가사처럼 사랑이 있기에 이 모든 변화가 즐겁고 삶이 살아갈만하다고 느껴집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가는 것이 즐겁고 살아갈만한 일이 되기 위해선 주님을 사랑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함에는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고 누리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렇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무엇일까요? 자신을 죽이는 것. 내 잘못된 욕심을 죽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그 분이 사랑하는 것을 행하고 그 분이 싫어하는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잘못된 습관과 버릇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 잘못된 습관과 버릇을 모두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정말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나도 그 분을 사랑한다면 이제는 버려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내 삶의 주권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만군의 주님이 가장 낮은 곳에서 섬기는 자가 되셨습니다. 내 삶의 주권을 드린다는 것은 내 삶의 모든 것을 주님의 뜻대로 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과 내 삶 전체를 동행하길 원한다고 하면서 주님에게 한 시간도 내지 못하고 있다면 어찌 동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내가 주님에게 $100을 내놓지 못하는데 어찌 내 삶 전체를 맡기고 동행할 수 있겠습니까?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는 주님의 말씀에는 이미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 보좌를 버리고 우리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위해 피와 물을 쏟으시는 주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하여 내 모든 것을 버리는 것처럼 너희도 나를 사랑함으로 너희 것을 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이 주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네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함으로 날마다 죽습니다”라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믿음의 행진을 하길 원하십니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길 원하십니까?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에 우리도 사랑으로 응답하며 우리를 죽이며 나아가야 합니다.

다트머스 한인교회 담임목사 김승용